자동차는 하루의 상당 시간을 주차장에서 멈춘 상태로 보냅니다. 시동이 꺼져 있는 동안은 이동 수단으로서 기능을 잠시 멈추는 것이죠. 하지만
대용량 배터리를 품은 전기차(Vehicle)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동이 필요할 때는 배터리를 충전하고, 운행하지 않는 시간엔 에너지를 지역 전력망(Grid)으로 보내는 양방향 전력 기술인 ‘V2G(Vehicle-to-Grid)’
덕분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전기차로 누릴 수 있었던 외부 전력 공급 기능은 캠핑 등 야외 활동에서 소형 가전제품을 작동하는 V2L(Vehicle-to-Load) 단계에 그쳤습니다. V2G는 전기차에서 전력을 다시 꺼내 쓴다는 점에서 V2L과 같지만, 에너지를 받는 대상의 폭은 훨씬 방대합니다. 특정 제품이나 건물이 아닌 전력망으로 에너지를 보내면 그 순간 전력이 필요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거든요. 기술 상용화를 위해선 그 규모에 걸맞은 실증 서비스도 필수적입니다.
V2G 실증 서비스를 위해 현대차그룹이 향한 곳은 제주도입니다. 제주도를 선택한 이유는 지역과 기술의 특성 때문입니다. 이곳은 풍력과 태양광 등을 이용한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전체 에너지의 20%를 넘나듭니다. 지난 2023년에는 약 40%까지 치솟았던 사례가 있을 정도로 신재생에너지 활용이 활발한 지역이죠.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급변하는 ‘간헐성’도 도드라져서, 전력 수요는 낮은데 발전량이 많을 때는 강제로 발전을 제한하고 남는 전력을 육지로 보낼 정도입니다.
이때 V2G는 지역 곳곳에 퍼져 있는 전기차들을 에너지 저장소로 활용해 전력망을 안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낮 시간대에 초과 공급된 전력으로 전기차를 충전하고, 밤에는 다시 전기차에서 에너지를 뽑아 쓰는 것입니다. 전력을 특정 장소에 모아두는 에너지 저장 장치(Energy Storage System)와 비교하면 V2G 충·방전 설비를 갖춘 주차장 외 별도 부지가 필요 없고, 구축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장점도 지닙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2월 제주도청, 모빌리티 플랫폼 쏘카, 에너지 ICT 전문기업 헤리트, 전기차 충전 솔루션 기업 제니스코리아와 협력해 국내 V2G 시범 서비스를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제주공항 인근에 위치한 제주 쏘카터미널에 전용 충전기 15기를 설치하고 현대차 아이오닉 9과 기아 EV9 등 총 20대를 투입했습니다.
실증의 주된 목표는 제도와 기술, 시장 가능성의 검증이었습니다. V2G 상용화에 필요한 법규를 파악하고 차량과 충전기의 전력 제어 기술을 끌어올리기 위함이었죠. 먼저 충전기의 안전 점검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일반 충전 시설과 달리 양방향 충전기와 관련된 안전 기준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부와 협의하며 충전기 및 차량의 방전 출력 등을 고려한 안전 점검 기준을 제안했습니다.
V2G가 ‘유연성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도 입증했습니다. 유연성 자원은 ESS나 양수발전처럼 전력의 생산과 소비를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인프라를 뜻합니다. 한국전력과 함께 시간대별 충·방전 부하와 전력 수요 등을 분석한 결과, V2G가 지역의 배전망 흐름을 원활하게 만들어줄 수 있음을 데이터로 확인했죠. 이 결과를 기반으로 전기차는 공식적인 지역 유연성 자원으로 등록될 예정입니다.
모빌리티 플랫폼 쏘카와의 B2B 실증은 제주도민과 함께하는 B2C 시범 서비스로 이어졌습니다. 제주도 곳곳에 거주하고 있는 아이오닉 9 및 EV9 오너 4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요. 고객 대부분은 에너지 서비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았으며, V2G를 통한 경제적 혜택과 신기술을 접해볼 수 있는 기회에 이끌려 참여를 결정했습니다. 자영업부터 농업, 사무직, 레저 등 직업군도 다양해 시간대별 데이터 수집에도 용이했습니다.
해당 사업을 이끌고 있는 현대차그룹 EV V2X팀 김민형 책임매니저는 개인 고객 대상 실증의 필요성에 대해 이와 같이 설명했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차량 이동 패턴 속에서 V2G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 체크하고자 했습니다. 거주지와 직업, 출퇴근 시간 등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일반 고객의 일상 속에서 V2G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작동하는지 살펴보고, 그 안에서 V2G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시범 서비스 범위를 넓혔습니다.” 그렇게 지난 5월, 현대차그룹이 참여 고객 가정과 직장에 양방향 충전기를 무상으로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실증이 시작됐습니다.
개인 맞춤형 서비스 준비 과정은 이전 실증과 접근법부터 달랐습니다. 제주 쏘카터미널의 V2G 충전기는 전용 알고리즘이 배터리 잔량과 시간대를 분석해 충·방전을 스스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참여한 제주도민들은 생활 패턴이 천차만별이라 운전자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도 전력망에 연결할 수 있는 스케줄 관리 기능이 필요했습니다.
EV V2X팀은 이를 해결하고자 시범 서비스 참가자들의 현대차그룹 전기차 전용 앱인 E-pit 앱 내에 ‘마이V2G’ 탭을 추가했습니다. 해당 메뉴 속 차량 운행 스케줄 관리 옵션에 근무 시간과 요일 등 각자의 생활 패턴을 입력하면, 여기에 맞춰 충·방전을 실행하도록 했죠. 가령 출근 전에는 이동을 위해 배터리를 충분히 채워 놓고, 오랜 시간 차량을 쓰지 않을 때 전력망으로 방전하는 식입니다.
제주시 한경면에 거주하며 실증에 참여하고 있는 아이오닉 9 오너 고향미 씨도 이 기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배터리가 30%까지 떨어지면 충전 계획을 세웠어요. 그런데 V2G 시범 서비스에 참여한 뒤부터는 차를 세워둘 때 항상 케이블을 연결해 둡니다. 최소 충전량과 목표 충전량을 설정하면 알아서 작동하거든요. 저는 간호사라서 3교대 근무를 하는데, 근무 스케줄에 따라 차량 이용 시간을 입력하면 출근 직전에 80~90%가 충전이 되어 있어요.”
운전자가 체감할 수 있는 V2G의 또 다른 장점은 충전 요금 절감과 방전을 통한 경제적 혜택입니다. 현대차그룹은 V2G 서비스를 통해 전기차 오너가 실질적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려 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전기 요금이 저렴할 때 차를 충전하고, 비쌀 때 방전하는 구조인데요. 현재는 방전한 전력에 요금을 책정하는 기준이 없어, 실증 참여 고객의 경우 시범 서비스 기간 동안 충전 요금을 전액 지원하는 방식으로 혜택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김민형 책임매니저는 V2G의 효과를 높이는 건 무엇보다 ‘습관’이라고 말합니다. “V2G는 충전기 연결 시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연결 시간이 길어야 자원을 확보할 수 있고, 그 자원으로 에너지를 거래할 수 있거든요. 결국 주차 상태에서는 꼭 충전기를 연결하는 습관을 들여야 효과를 제대로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습관은 ‘운영 리포트’라는 시각 자료로 돌아옵니다. 방전으로 얻은 수익과 충전 요금 절감 수준을 한눈에 볼 수 있어, V2G가 소비자에게 수익형 자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합니다.
제주도에서의 실증 서비스는 V2G 인프라의 기반을 서서히 다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현실적 과제들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와 인프라 구축입니다. 법적 기준과 근거가 없으면 사업 자체를 확장할 수 없습니다. 그 과제 중 하나는 전력 거래 시장의 형성입니다. 일반 운전자가 실생활에서 혜택을 체감하기 위해선 명확한 보상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는데요. 현재 우리나라의 전기 요금은 가정용, 농업용, 상업용 등 전력의 사용 목적과 시간대별로 나뉘어 있어, V2G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서비스와 매끄럽게 연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전용 요금제 도입 등으로 분명한 혜택의 기준을 세워야만 사업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주택의 형태 또한 고민거리입니다. 제주도는 상대적으로 단독주택 비중이 높지만, 내륙의 대도시에는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많습니다. 이러한 경우 전기차 충전소는 개인이 아닌 공공의 영역이므로 V2G 충전 구역 점유 및 수익 배분과 같은 어려움을 마주하게 됩니다. 해결책은 역시 현장 실증입니다. 각각의 문제를 풀어낼 제도가 구축될 때까지, 기업과 고객을 통한 검증을 꾸준히 이어가며 답을 찾아야 합니다.
실증 과정 중에는 충·방전의 변수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시적인 전압 상승으로 인한 연결 중단 현상입니다. 원인은 과도하게 생산된 제주도의 전력이었습니다. 전력을 소비할 주변 시설이 부족한 상태에서 전력망으로 전기를 내보내려다 보니 배전선로 전압이 일시적으로 치솟았고, 설비 보호를 위해 충전기와 차량 연결이 자동으로 차단된 것이었죠. 이때는 아무리 충전 케이블을 차량에 오래 연결해 두어도 목표 충전량 또는 방전량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자칫 고객의 차량 운행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고요. 그래서 이를 복구하고 상황에 맞춰 전력 흐름을 유연하게 제어하는 기술의 고도화도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신호 중 하나는 정부 또한 현대차그룹의 제주도 실증 서비스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9월 10일에는 정선화 기후에너지환경부 녹색전환정책관, 황계영 한국자동차환경협회장을 비롯한 정부와 한국전기연구원, 한국자동차환경협회 관계자들이 제주 쏘카터미널의 V2G 실증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이곳에서 시연을 통해 실제 충·방전 과정을 체크하고, V2G 상용화 로드맵 추진 결과를 보고받으며 해당 기술이 어느 수준까지 도달했는지 확인했습니다. 제도 마련의 키를 쥐고 있는 정부의 폭넓은 지원이 시작된다면, 보다 이른 시점에 정식 V2G 서비스를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V2G는 전기차에 ‘움직이는 ESS’라는 새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전기차가 이동 수단과 에너지 저장소라는 두 역할을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현대차그룹은 지금도 끊임없이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기차는 주차장에 머무는 동안 지역 전력망의 숨통을 틔워주며, 낭비되는 에너지를 줄이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기능할 전망입니다.
김민형 책임매니저는 전체 전력망을 혈관에 비유하며 V2G의 역할을 쉽게 풀어 설명했습니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의 송전망이 대동맥과 같은 큰 혈관이라면, 지역 전력망은 그 곁으로 뻗은 모세혈관입니다. 발전소라는 심장이 뛰면 에너지는 넓은 쪽에서 좁은 쪽으로 흐르는데요. V2G는 모세혈관의 끝에 전기차를 연결해 전력을 더 넓고 적절한 방향으로 분산시킵니다. 그렇게 되면 대동맥이 받는 부담이 줄어 전체 에너지가 한층 안정적으로 흐르게 됩니다.”
아울러 전기차는 전력 저장 방식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기존 발전소와 송전망은 필요 이상 생산된 전력을 원하는 곳을 지정해 옮길 수 없습니다. 반면 전기차는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죠. A 도시에서 채운 에너지를 B 도시에서 방전하는 등의 운영으로 지역 간 에너지 불균형을 해소할 수 있습니다. 전기차를 전력 흐름을 조율하는 매개체로 사용함과 동시에, 자동차의 본래 목적인 ‘이동’까지 에너지를 다루는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주도민의 일상에서 조용히 쌓이고 있는 실증 데이터는 미래 전력망과 모빌리티의 공존 가능성을 증명합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V2G 상용화가 실현되는 순간, 멈춰 있던 전기차는 그 존재만으로 가치를 발휘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도로 위 자동차가 우리 집의 불을 밝히고, 국가의 에너지를 순환시키는 에너지 자산으로 거듭날 시대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진. 박상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