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브라질에서 시즌 반환점을 돈 세계 내구 챔피언십(World Endurance Championship, 이하 WEC)는 미국 텍사스(론스타 르망)에 이어 이번 시즌 유일한 아시아 라운드인 일본에서 제6전을 시작했다. 스즈카와 함께 일본을 대표해 온 후지 스피드웨이는 1966년 개장된 역사와 전통의 서킷으로, 지난 2000년부터 토요타가 인수해 운영해 오고 있다.
후지 스피드웨이는 1960년대 미국 나스카(NASCAR) 유치를 염두에 두고 타원형 코스로 기획했지만 산기슭 경사지라는 한계 때문에 결국은 유럽형의 로드 코스로 재설계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오벌 코스에나 쓰이는 ‘스피드웨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바로 이런 흔적이다.
후지 스피드웨이는 1976년 일본 최초의 F1 그랑프리를 개최한 역사적인 장소이며, 오랫동안 미쓰비시 부동산이 소유했다가 지난 2000년 가을, 토요타 자동차에 인수되었다. 당시 토요타는 F1 도전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르만 틸케(Hermann Tilke)에게 재설계를 맡겨 레이아웃을 새롭게 손보았고, 2007~2008년 스즈카로부터 F1 일본 그랑프리를 되찾아오는 데 성공했다.
후지에서의 내구 레이스 역사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5년 12월 완공된 후 67년에 TMSC(토요타 모터 스포츠 클럽) 주최로 후지 1000km를 개최했고, 1985년에는 전일본 내구 선수권 중 하나인 국제 레이스로 격상되었다. 오일 쇼크의 위기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던 후지 1000km는 세계 내구 레이스가 위기를 맞자 1992년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2년, WEC가 현대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출범하면서 후지 역시 캘린더에 돌아왔다. 이때부터는 기존의 거리 대신 6시간을 달리는 시간 포맷 경기로 바뀌었다. 특히 하이퍼카 시대의 강력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 토요타의 홈그라운드로서 지난 2025년에는 WEC 통산 100번째 레이스라는 역사적인 이정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WEC 경기 12번을 개최해 시리즈 역사상 네 번째로 많이 찾은 서킷으로 꼽힌다.
후지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후지 스피드웨이는 4.563km로 짧은 편이며 섹터마다 극명하게 특성이 갈린다. 1.4km가 넘는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시속 330km를 넘긴 경주차들은 1번 코너 직전 급브레이크를 통한 추월 경쟁을 벌인다. 휠 락이 걸려 코스를 벗어나거나 사고가 일어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스폿이다.
3번 코카콜라 코너를 지나면 내리막 경사면을 따라 4~5번의 고속 100R 코너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에서의 강렬한 횡G는 드라이버와 타이어에 엄청난 부담을 준다. 8~9번 내리막 300R은 완만해 보이는 것과 달리 강한 횡하중을 견뎌야 한다. 그 끝에는 3섹터를 시작하는 10번 던롭 코너가 자리 잡고 있는데, 브레이크 타이밍 잡기가 까다로운 지점이다.
3섹터는 급한 오르막을 따라 타이트한 좌우 코너가 연속되는 테크니컬한 구간이다. 과감함보다는 정밀하고 부드러운 조작이 필요하다. 특히 최종 코너인 16번 파나소닉은 턴인 시점이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코너로, 이어지는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속도 차이로 직결된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랩타임 전체를 망칠 수 있는 핵심 열쇠다.
공력 세팅은 직선이 긴 만큼 최대한 공기저항을 낮추어야 하겠지만 이렇게 되면 반대로 3섹터에서는 힘을 쓰기 힘들다. 양극단 사이 최적의 타협점을 찾는 것이 각 팀의 숙제다. 주말에 예보된 비도 큰 변수다. 후지산 기슭에 위치한 지형적 특성상 날씨가 변화무쌍하다.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구름이 끼고 폭우가 쏟아지는 경우도 흔하다. 노면이 살짝 젖은 하프 웨트라면 슬릭이나 웨트로의 교체 타이밍에 따라 순위가 요동친다. 그래서인지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서킷 중 하나로 손꼽힌다. 지난 2년간 폴포지션에서 출발한 드라이버 중 누구도 포디엄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해 우승을 차지했던 것은 9번 그리드에서 출발했던 알핀으로, 드라이버 중 한 명은 현재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소속인 폴-루 샤탕(Paul-Loup Chatin)이었다. 안드레 로테러(André Lotterer) 역시 후지에서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다. 커리어 초반, 일본에서 15년이나 활동했기에 로테러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2024년 우승 외에도 WEC 시리즈를 통틀어 후지에서 포디엄에 5번 올랐다. 후지에서 아직 주행 데이터가 전무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으로서는 이 두 명의 경험은 큰 자산이다.
수석 엔지니어인 저스틴 테일러(Justin Taylo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론스타 르망에서 거둔 이번 시즌 최고 성적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맞아떨어졌을 때 우리 팀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결과물이죠. 후지 스피드웨이에서는 사전 테스트 없이 경기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시뮬레이션과 시즌 내내 축적해 온 차량 세팅 노하우에 기대야 합니다. 좋은 성적을 내려면 차량은 긴 직선로에서 빠르고, 100R 코너에서는 안정적이며, 구불구불 오르막이 있는 3섹터에서 뒷타이어 온도를 효과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게다가 거의 항상 비가 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후지 스피드웨이는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것입니다.”
한편 지난해 우승자인 샤탕은 후지 스피드웨이와 GMR-001 하이퍼카를 이렇게 평가했다. “지난해 우승으로 좋은 추억이 있는 일본에 돌아와 GMR-001 하이퍼카의 잠재력을 시험해 볼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대됩니다. 후지 스피드웨이는 직선 구간에서의 속도와 코너링 성능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하는 까다로운 트랙입니다. 긴 스틴트 때문에 타이어 관리도 중요하죠. 서킷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마지막 섹터, 특히 최종 코너에서 메인 스트레이트로 이어지는 구간입니다. 이 부분을 완벽하게 공략했을 때의 기분은 정말 최고입니다. 저희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19번 차량으로 첫 포인트를 획득하는 것입니다. 잠재력은 충분하며, 시즌 초반부터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레이스 내내 모든 것을 잘 해내면서 안정적인 레이스를 펼치는 것이 관건일 것입니다.”
론스타 르망에서 페라리가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시즌 막판 챔피언십 타이틀 예측은 더욱 복잡해졌다. 선두를 달리다가 리타이어한 토요타는 근소한 차이로 포인트 선두를 지키고 있다. BMW가 불과 9점 차이로 뒤쫓는다. 우승으로 대량 득점에 성공한 페라리가 선두에 26점 차이까지 따라붙어 타이틀 쟁탈전은 3파전 양상이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은 여전히 토요타임에 틀림없다. 후지는 그야말로 집 앞마당이나 다름없으며, 실제로도 지금까지 9승이라는 압도적인 전적을 거두어 왔다. 최다승 기록 외에도 최다승 드라이버(4회, 세바스티앙 부에미)와 하이퍼카 예선 랩타임 기록(카무이 코바야시)도 보유하고 있다. 가장 최근 우승은 2023년이다.
BMW의 M 하이브리드 V8은 미국에서 토요타가 리타이어한 절호의 기회를 살리지 못해 큰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후지 스피드웨이와의 상성은 나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이번 시즌의 호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페라리는 후지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강력한 페라리 499P가 지금까지 포디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것은 후지 6시간이 유일하다. 이번에 그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졌다.
지난해 후지 우승자인 알핀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WEC를 떠난다. 막대한 비용을 필요로 하는 F1과 WEC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이번 경기부터는 드라이버진마저 축소해 프레데릭 마코비키(Frédéric Makowiecki)와 안토니오 펠릭스 다 코스타(António Félix da Costa)를 빼고 차량 한 대당 2명씩만 엔트리했다. 또 하나의 프랑스 제조사인 푸조는 계속되는 부진을 끊어내기 위해 현재 완전한 신차를 개발 중이다. 이번 경기에서는 팀의 핵심인 로익 뒤발(Loïc Duval)이 WEC 사상 9번째로 통산 80전 출전을 눈앞에 두고 있다.
9월 25일 오전, 흐리지만 따뜻하고 건조한 상태(기온 24℃, 노면 온도 35℃)에서 첫 번째 자유주행(FP1)이 시작됐다. #8 토요타가 유일하게 1분 29초대에 들며 가장 빠른 기록을 세웠다. 캐딜락과 페라리가 그 뒤를 이었고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19 GMR-001 하이퍼카가 6번째, #17은 16번째였다.
오후 2시 반에 시작된 FP2 때는 구름이 걷히고 바람이 불면서 기온은 23℃로 선선했다. 노면 온도는 동일한 35℃였다. 알핀이 가장 빠른 기록을 작성하고 애스턴 마틴이 그 뒤를 따랐다. 제네시스 듀오는 각각 4번째와 5번째 기록이었다. 이번에는 상위 11대가 1분 29초대에 들었고 1~15위가 1초 차이가 나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에 FP3는 많은 비가 내려 기온 18℃, 노면 온도 21℃로 떨어졌다. 연습과 예선 내내 맑았다가 결승에서 갑자기 비가 내렸다면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악명 높은 후지 웨트 컨디션을 미리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36 알핀이 가장 빨랐고 애스턴 마틴 듀오가 그 뒤에 있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19 샤탕이 5번째, #17 차량은 피포 데라니(Pipo Derani)가 7번째 기록을 작성하며 빗속에서도 훌륭한 페이스를 보여주었다. LMGT3에서는 레이싱팀 터키 바이 TF팀의 쉐보레 콜벳(#34)이 가장 빨랐고 팀 WRT의 BMW M4와 프로톤 컴페티션의 포드 머스탱이 그 다음이었다.
오후 2시, LMGT3를 필두로 예선이 시작되었지만 많은 비가 내리고 안개까지 짙어졌다. 세션 시작 직후 #21 페라리가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대파되면서 적기가 발령되고 세션은 중단되고 말았다. 한동안 비가 계속될 것으로 예보됨에 따라 하이퍼카 클래스 포함 예선과 하이퍼폴 세션 취소가 결정되었다.
결승 그리드는 FP1~FP3에서 작성했던 랩타임을 기준으로 #36 알핀이 폴포지션이 되었다. 그 다음은 #007 애스턴 마틴이었지만 FP3 충돌 사고로 페널티를 받아 4 그리드로 밀려남에 따라 알핀 두 대가 1열을 차지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19 차량도 덕분에 3 그리드로 올라섰고, #17 차량은 한 줄 뒤인 5 그리드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창설 후 가장 좋은 스타팅 그리드다. 반면 챔피언십 타이틀 경쟁 중인 토요타와 BMW, 페라리 모두 중하위 그리드에서 경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LMGT3에서는 프로톤 #77 포드 머스탱이 지난해 론스타 르망 이후 1년 만에 폴포지션을 차지했다.
9월 27일 일요일 오전 11시, 후지 6시간 결승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기온 18.5℃, 노면 온도 21.5℃에 습도 91%로 비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노면은 군데군데 젖어 있었다. 스타트와 동시에 GT 클래스가 1번 코너에서 한데 뒤얽히는 사고로 세이프티카가 출동했다.
경기 초반을 지배한 것은 알핀이었다. 닉 드 브리스(Nyck de Vries)가 몰던 #7 토요타는 #35 알핀을 추월하려다 접촉하면서 스핀해 큰 손해를 보았다. 애스턴 마틴의 페이스도 강력했다. 다니엘 훈카데야(Daniel Juncadella)가 모는 #19 제네시스는 애스턴 마틴의 추월을 허용해 4위에 자리 잡았고, 로테러의 #17 제네시스는 8위에 있었다. 토요타 듀오는 중하위권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3시간이 흘렀을 때 폴 디 레스타(Paul di Resta)가 모는 #93 푸조가 기어박스 문제로 트랙에서 벗어나면서 풀 코스 옐로가 발령되었다. 한편 페라리는 선두 경쟁에 전혀 끼어들지 못했다. 더구나 제임스 칼라도(James Calado)의 #51 페라리가 콜벳에게 밀려 잔디밭에 뛰어드는 아찔한 장면도 있었다.
경기 중반부에도 애스턴 마틴과 알핀이 치열한 선두 경쟁을 이어갔다. 경기 시작 4시간이 흘렀을 때 선두로 올라선 알렉스 갬블(Alex Gamble)의 #007 애스턴 마틴은 피트 레인 위반으로 페널티를 받는 바람에 자리를 지킬 수 없었다. 갬블이 페널티를 수행하는 사이 알핀 듀오가 원투로 나서 다시 대열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007 애스턴 마틴은 7위까지 밀렸지만 여전히 페이스가 좋았고, #009 애스턴 마틴은 3위에 있었다. 샤탕이 모는 #19 레이스카는 6위로 좋은 페이스를 이어갔다.
한편 챔피언십 경쟁자인 BMW와 페라리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르네 라스트(René Rast)가 모는 #20 BMW는 #51 페라리와 접촉 후 타이어가 펑크 났다. 게다가 피트에서는 에어잭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1시간 51분을 남기고 #50 페라리가 최종 코너에서 멈추어 섰다. 직후에는 #8 토요타가 애스턴 마틴과 접촉하며 스핀했다. 이 사고로 #007 애스턴 마틴에게 5초 페널티가 내려졌다. 여기에서 두 번째 VSC(Virtual Safety Car)가 발령되자 많은 차들이 피트로 몰려들었다.
경기 종료 1시간 11분을 남기고 여전히 알핀이 원투였고 마튜 자미네(Mathieu Jaminet)가 모는 #19 제네시스가 5위 자리에서 토요타의 료 히라카와(Ryo Hirakawa)를 틀어막고 있었다. 데라니(#17)는 10위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 듀오 모두 득점권에 있었다. 토요타는 #7 차량이 페널티를 받아 12위로 떨어졌다. #8 토요타의 끈질긴 추격을 받는 GMR-001 하이퍼카는 메인 스트레이트 속도 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1초 미만의 근접전을 펼쳤던 한일 두 경주차는 1시간 남은 상황에서 1.5초로 거리가 점차 벌어졌다.
58분을 남기고 #58 맥라렌 LMGT3 차량이 메인 스트레이트에서 옆 차량과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세이프티카가 출동하면서 경기 흐름에 큰 변화가 생겼다. 파편과 부서진 경주차를 치우고 가드레일까지 수리하느라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피트 전략에 대한 각 팀들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코스에는 다시 비가 내려 와이퍼를 작동하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하지만 강수량이 많지는 않을 것이라 판단해 웨트 타이어를 끼우는 차는 없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의 #19 차량은 피트 작업이 늦어지며 9위로 밀려났고, 데라니의 #17 차량은 한 바퀴 늦게 피트인해 12위까지 내려앉았다. 반면 #8 토요타는 타이어를 바꾸지 않고 연료만 최소한으로 채운 채 작업을 끝내 단번에 선두로 올라섰다. #15 BMW도 이미 사용한 타이어를 그대로 쓰는 승부수로 2위에 올랐다. WEC에서는 경기당 사용 가능한 타이어 수량이 제한되어 있어 피트스톱마다 매번 타이어를 교체하기가 어렵다. 스틴트를 극대화하는 도박이 통한 셈이다. 한편 알핀과 애스턴 마틴은 3, 4위가 되었다.
세이프티카가 빠지고 경기가 재개되면서 21분짜리 스프린트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대열에 섞인 GT카를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엄청난 혼전이 예상되었다. #8 토요타의 히라카와가 도망치고 BMW와 알핀이 맹렬하게 뒤쫓았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19 자미네가 8위, #17 데라니는 12위에 있었다. 데라니는 기온 하락으로 타이어 공기압이 규정치 아래로 떨어지면서 드라이브 스루 패널티를 받아 득점권과는 완전히 멀어졌다. 기온에 따른 공기압 변화를 미리 계산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타이어 공기압이 낮아지면 노면 접지 면적이 넓어져 코너 주행과 제동에는 도움이 되지만, 안전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WEC를 비롯한 대부분의 모터스포츠에서는 최소 공기압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15 BMW와 #36 알핀이 2위 자리를 두고 치고받는 격전을 벌이는 사이 #8 토요타는 편하게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5분을 남긴 상황에서 GT 대열에 가로막히자 알핀과의 거리는 0.5초까지 줄었다.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자미네가 모는 #19 차량이 다시 피트로 들어가 11위로 밀려났다.
결국 #8 토요타가 후지에서 3년 만에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홈그라운드에서의 10번째 우승이었다. 전략적 도박이 모든 것을 뒤집었다. #36 알핀이 2위, #15 BMW 3위로 포디엄을 차지했고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11위(#19)와 15위(#17)로 아쉽게 포인트 획득에 실패했다. 내구성 문제도 없었고 경기 초반 상위권을 다툴 수 있는 좋은 페이스도 보여주었다. 다만 기상 변화에 대한 대응이나 복잡한 경기 상황에서의 전략적 선택 등 개선해야 할 부분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포 데라니는 경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쉽게도 타이어를 교체하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상보다 기온이 빨리 떨어졌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어요. 분명 배울 점이 많았던 주말이었습니다.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줬지만, 정상에 오르려면 많은 노력과 배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더 강해져 돌아오겠습니다. 지난 경기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이 이번에 더 나아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고,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계속 배우고 발전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즌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두 개의 경기는 모두 유럽에서 열린다. 중동의 긴박한 정세 때문에 카타르와 바레인에서 경기가 불가능해지면서 바르셀로나와 몬차로 대체되었다. 10월 18일 열리는 제7전 바르셀로나 6시간의 무대는 F1 스페인 그랑프리로 익숙한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서킷이다. WEC는 처음이지만 ELMS(European Le Mans Series)에는 4시간 경기가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코너가 연결되어 있다고 할 만큼 리듬이 중요한 코스이고, 트랙 폭이 좁아 추월 난이도가 극히 높은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후지 6시간 레이스에서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GMR-001 하이퍼카의 경쟁력과 함께 보완해야 할 과제도 확인했다. 이제 남은 두 경기에서는 레이스 상황에 따른 전략 판단과 타이어 대응 능력을 한층 끌어올려야 한다. 신생팀으로서 첫 시즌을 치르고 있는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은 지금까지 여러 경기에서 높은 잠재력을 발산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이어지는 바르셀로나 레이스에서는 새로운 서킷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안정적인 운영을 통해 GMR-001 하이퍼카의 가능성을 더욱 구체적인 결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글. 이수진(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